생각의 가을, 파주 지지향 북스테이

2018.11.16

나무 안에 빛이 머무는 것 같은 방


비밀스러운 아지트, 파주출판도시 초입에 자리한 게스트하우스 지지향이다. 게스트하우스, 보통 생각하는 도미토리가 있는 숙소가 아닌, 소규모 호텔에 가깝다. 지지향(紙之鄕)은 꽤 근사한 뜻을 가지고 있다. ‘종이의 고향’이란 뜻이다. 나무에서 종이로, 종이에서 책이 태어나는 곳. 출판도시와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무수한 책에 둘러싸여 있으면 내 인생의 모든 해답이 여기 있을 것 같고, 이 공간에서의 생각은 왠지 멋질 것 같은 느낌이다. 총 5층으로 이뤄진 건물로 서가가 있는 1층은 무수한 책들이 겹겹인데, 위층의 숙소는 더없이 간결하다. 공간이 주는 힘, 지지향에서는 묘하다. 가을 초입이면 파주출판도시에서 깊이 있는 북축제도 열린다. 그야말로 북소리 북적이는 동네가 된다(축제 이름이 '북소리'다).



지지향은 파주출판단지 초입에 자리한다. 파주출판단지는 1988년 정기적으로 북한산을 오르며 출판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이 힘을 모아 만든 계획도시다. 15,610,00㎡(47만 2천1백 평)의 갈대밭이었던 이곳은 책으로 채워지게 된다. 출판사를 물론 인쇄사, 제본사, 저작권 중개사, 출판유통센터, 디자인 회사 등 300여 개의 회사가 들어서 있다.
2007년 게스트하우스 지지향이 개관했고, 2014년 독특한 서가인 지혜의 숲이 오픈했다. 이를 품고 있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는 다목적홀, 대회의실 등도 들어서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이 건축물은 2004년 제14회김수근 건축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붉은색 내후성 강판과 노출 콘크리트, 목재가 자연에 모나지 않게 감각적으로 자리한다.



나무가 책이 되고, 책이 지혜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 서가, 지혜의 숲은 아시아 출판 문화정보센터 1층에 위치하는데 3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이곳은 50여만 권의 책이, 8m 높이에 3㎞ 넘게 책장이 이어져 있다. 지혜의 숲 1은 학자와 지식인 연구소에서 기증한 도서가 있는 공간이다. 지혜의 숲 2는 출판사가 기증한 도서들이 모여있다. 각 출판사의 책의 역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지혜의 숲 3은 지지향의 로비인데, 출판사와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기증한 도서들로 채워져 있다. 지혜의 숲 3에 지지향 프런트와 엘리베이터가 있다.



방에 들어서면 전체적으로 나무 느낌이다. 연한 빛의 탁자와 의자. 짙은 빛의 마루. 마루는 밟을 때마다 ‘끼익 끼익’거리는 소리가 난다. 오래된 틈에서 나는 나무 소리다. 호텔처럼 바스락거리는 침구는 아니지만 순면 느낌은 부드럽게 잠을 불러온다. 모나지 않은 공간.



호텔 같은 어메니티는 없다.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일회용품 대신 간소하게나마 샴푸와 보디클렌저, 물비누가 있다. 지지향은 2층에서 5층까지 방과 회의실 등으로 이뤄지는데 5층엔 작가의 방이 있다. 박완서와 고은, 김훈 등 국내 작가의 전집과 소장품으로 꾸며져 있는 곳. 정말 좋아하는 작가라면 그 방에 머무르는 것도 특별한 느낌을 받을 터.



TV가 없다는 건 잠 혹은 책을 부른다. 잠이 오지 않는 밤, 1층의 지혜의 숲 3에서는 24시간 부엉이가 되어 책에 빠져 볼 수 있다. 해질 무렵, 방의 창이 서쪽이 아니라면 산책을 나서보자. 출판 도시의 갈대 샛강 전경을 배경으로 노을을 바라보기 좋다. 그중 건물 내에 있는 다이닝 노을이 뷰 포인트다. 덧붙이자면, 다이닝 노을에서의 식사는 꽤 근사하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피자 등의 메뉴가 있는데 파주출판도시 직원들이 자주 오는 것을 감안해 계절마다 메뉴 구성이 새로워진다. 제철 재료로 만드는 음식은 신선함이 느껴진다.



산책길은 얼마든지 반경을 넓힐 수 있다. 파주출판도시 개성 있는 건축물을 보며 걷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지혜의 숲으로 이어지는 문을 나서, 김소월 시의 다리를 건너면 갈대가 바람 따라 서걱거린다.



느티나무 옆엔 작은 고택이 하나 있다. 이 고택도 소중하게 옮겨온 것이다. 전북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김동수 가옥’ 오른편에 있던 ‘김동수 작은댁’의 사랑채다. 10년에 걸쳐 천천히 지은 집은 1834년에 완공, 170여 전의 역사를 지닌 고가다. 조선조 선비의 꼿꼿하면서 단아한 풍취가 느껴지는 집이다. 이 고택이 쓰러져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출판도시 건설을 하고 있던 중 옮겨와 보존하기로 했다.


사랑채는 이미 지붕 한쪽이 무너져 내렸는데, 무너져 가는 우리 문화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통 한옥에 담긴 선인들의 지혜가 ‘책의 도시’를 세워 나가는 데도 그대로 깃들이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다. 서호정사(西湖精舍)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서쪽에 갈대 샛강이 흐르고 있고,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을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일 것이다. 나무는 풍경을 만들고, 책을 만들고, 마음을 다듬어나간다.